l 등반리더 : 이운배, 박성록, 김미숙, 양주종, 신재근
since 창립일 : 1981년 10월 19일 / 홈페이지 2001년 8월 9일 / E-MAIL : sansaram@korm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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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승도 때로는 최고가 된다
☞아화고개-만불산-관산-한무당재-남사봉-어림산-시티재☜




♣ 산행개요 ♣


◆ 산행지 : 낙동정맥 제8구간[아화고개-시티재]
◆ 일시 : 2008. 9. 20.(토)/21.(일)[무박산행]
◆ 날씨 : 흐림/비(새벽 흐림/오전 비/오후 갬)

◆ 종주경로 : ☞아화고개(130m)/4번국도 → 만불산(279m)  → 관산(393.59m) → 청석재/한무당재(220m)/909번지방도 → 남사봉(470m) → 마치재/927번지방도 → 어림산(510.4m) → 호국봉(384m) → 시티재(195m)/28번국도◀

■ 포인트별 구간 도상거리 : ☞아화고개-(5km)-관산-(5.9km)-한무당재-(2.8km)-남사봉-(1.5km)-마치재-(1.6km)-어림산-(7.4km)-시티재◀

■ 산행거리 : 약 24.2km

■ 시간대별 산행 코스 :

▣ 03:48 아화고개/4번국도 통과
□ 04:02 철탑(No.2) 지나 4거리 통과 직진/완경사오르막
▣ 04:35 만불산(279m)/우 내리막
□ 04:42 임도
□ 04:50 축사/농장/과수원 도로
□ 05:06 임도 벗어나 숲
□ 05:07 다시 임도
□ 05:15 납골묘 오르막
□ 05:25 봉우리 3개 넘어 급경사 내리막
□ 05:39 봉우리/좌 내리막/휴식 후 출발(05:41)
▣ 05:53 관산(393.9m)/묘1기
□ 05:59 관산능선 따라 관끝/우 급경사 내리막
□ 06:17 385m/우능선/평탄한 솔숲 길
□ 06:24 임도
□ 06:31 봉우리 공터/휴식 후 출발(06:34)  
□ 06:43 봉우리
□ 06:48 봉우리/우 내리막
□ 07:03 봉우리
▣ 07:18 351.4m/삼각점(경주42, 1982복구)/우 내리막
▣ 07:34 한무당재(청석재)/909번지방도/1차선 포장도로
□ 07:41 267m
□ 08:03 310m
□ 08:06 능선 공터/식사 후 출발(08:29)
□ 08:41 임도
▣ 08:55 남사봉(470m)
□ 09:01 임도
□ 09:07 390m
□ 09:19 안부
▣ 09:27 마치재/927번지방도
□ 09:44 1봉/휴식 후 출발(09:52)
□ 10:00 2봉(너덜)
□ 10:04 3봉
□ 10:09 4봉/朝鮮孝節閣高金公之墓/휴식 후 출발(10:12)
▣ 10:15 5봉/어림산(510.4m) 정상/뽑혀진 삼각점
□ 10:36 철탑(No.195)
□ 10:39 봉우리
□ 10:56 308m
□ 11:10 묘가 있는 봉우리/직진
□ 11:18 봉우리/좌 내리막/휴식 후 출발(11:40)
□ 11:45 좌측 철망울타리 시작/잡목의 저항
□ 12:00 봉우리
□ 12:02 안부
□ 12:11 능선분기봉/좌 내리막
□ 12:45 382.9m/돌탑/삼각점/휴식 후 출발(12:49)
□ 12:52 호국봉(340m) 표목
□ 13:02 안부/송신탑
▣ 13:18 시티재/안강휴게소

■ 산행시간 : 약 9시간 30분[휴식(42분)/식사(23분) 시간 포함]
■ 형태 : 좋은사람들 산악회와 함께(총원 28명)

■ 참조
□ 산행기: 주유천하(낙동정맥 변죽 울리기 7-8구간) / 높은산(낙동정맥 10-11구간)
□ 고도표: 권한철(낙동정맥 고도표 15-17구간)
□ 지도 및 거리: 백두대간 & 정맥 GPS 종주지도 중 낙동정맥 9구간(산악문화)







⊙ 계륵 같은 땜빵

한중 땅을 두고 유비와 다투던 조조가 전쟁이 힘든 상황을 계륵(먹을 건 없고 버리긴 아까운 닭갈비) 같다고 했는데 지금 땜빵이 바로 그 짝이다. 대부분의 구간을 종주한 낙동 정맥을 완주라는 글자에 얽매어 굳이 땜빵 할 필요가 있을까? 더군다나 이번 구간은 명산도 없는 비산비야(非山非野)가 대부분이다.

김재환님의 전화(땜빵 권유)와 때 맞춰 ‘요들’과 같은 방향(북진)으로 낙동을 하는 ‘좋은 사람들’에 끼어 미완성 종주에 나서기로 했다. 오전부터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기상청은 비를 예보해 우비를 챙긴 후 집을 나섰다(21:16). 하늘엔 누비이불 조각 같은 흰구름들이 천천히 흘러 간다.

당산역(21:56)을 거쳐 목적지인 사당에 도착(22:27) 했다. 공영주차장이 있는 1번 출구는 산꾼을 태우려는 버스들이 조금의 빈 틈도 없이 일렬 종대로 주차해 있다. 동대문과 양재만 산꾼들 메카인줄 알았더니 사당도 대단하긴 마찬가지다(사당에서는 처음 출발). 입구 바로 앞에서 내가 탈 버스(고려고속)을 발견하고 맨 뒷자리(우측)에 배낭을 부려 놓고 밖으로 나왔다.

승방평(僧房坪 옛날 남태령을 넘고자 하던 스님들의 임시 거처) 안내문 옆에는 분수대가 있고 한 켠을 맥문동이 차지 했다. 맥문동 보라색 꽃대는 어느새 꽃을 떨구고 작은 콩만한 열매가 달렸다.

꺽지님이 이번 산행부터 일반산행을 리드 한다며 동행하지 못해 아쉽다는 인사를 하고 지리산님을 기다리느라 약간 늦게 출발(23:11) 했다. 나해용님이 새 대장님(조피디님?)을 소개하고 날새기 전까지는 선두 후미 구분 없이 같이 갔으면 좋겠다는 안내를 끝으로 버스에 불이 꺼졌다.

충주 휴게소(12:25~12:47)에서 차가 선다. 잠깐은 맞아도 젖지 않을 만큼의 비가 내린다. 늦은 밤인데도 오가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간식을 먹기도 이른 시간이고 비 맞으며 어슬렁거리기도 뭐해 의자에 앉아 멍하니 오가는 사람들을 살피다가 버스로 돌아 갔다.

눈꺼풀만 덮었던 눈앞이 환해진다(평사휴게소 02:51~03:11). 다행히 비는 안 온다. 어쩌면 비를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다시 출발하여 목적지인 애기지휴게소에 도착(03:36) 했다.    







⊙ 겉(여름)과 속(가을)이 다른 산

능수버들이 먼저 반겨 준다. 7구간 마지막에 아화고개(땅고개-아화고개)에 도착했을 때는 능수버들의 싹이 막 돋기 시작했었는데(2008.3.23.) 어느새 잎을 떨궈내는 계절이 됐다.

벌레소리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요란하다. 버스 불빛 도움으로 등산 준비를 마친 대원들이 번호를 매기며(총원 파악) 천천히 출발했다. 질척거리는 굴다리를 통과하니 그닥 싫지 않은 시골냄새가 난다.

만불사 표지에서 도로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 갔다. 찌르르~, 뚜~뚜, 산에 들어서자 사방천지가 풀벌레 소리다. 대부분이 바이올린의 높은 음 같지만 구색을 갖춰 낮은 음도 있어 오케스트라를 live로 듣는다. 가을의 전령사인 풀벌레의 만찬에 산꾼 마음이 포만감으로 그득하다.

노랑나비 한 마리가 풀밭에 앉아 있다 대원들 발길에 날아 올라 랜턴 불빛에 팔자(8)를 그린다. 키만큼 자란 쑥을 선두가 길을 내느라 말 그대로 쑥대밭을 만든 탓에 향긋한 쑥 냄새가 은은하다.

철탑 주변이 꽃밭이다. 앞서 가던 여꾼(여성 산꾼)이 안개꽃 같다고 감탄을 거듭 하는데 들국화 종류가 분명한 흰 꽃이 사방천지에 피어 랜턴 불빛을 따라 하얀 물결이 부서진다.

선두가 무성한 풀 때문에 길을 내기가 힘든지 자주 멈춘다. 텅 비어 있는 왼쪽으로 거인 같은 만불보전(불상)이 어둠에 흐릿하다.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져 비 올까 노심초사 하는데 이내 멈춘다.

연이어 무덤을 지난다. 사람 사는 달동네와는 다르게 이 산은 위쪽이 아래쪽보다 부자들이 많은지(?) 올라갈수록 잘 꾸며진 무덤이다. 앞선 일행이 사진을 찍는다. 봉우리 같지도 않고 별로 올라오지도 않았는데 나무에 만덕산이란 표찰이 달려 있다. ‘이게 산이야?’ 여꾼의 이 한마디가 같이 올라온 대원들 느낌을 대변한다.

죽은 나무들이 흉물스럽게 서 있는 내리막이다. 올라온 것에 비하면 내리막이 급하고 길다. 이쪽 방향으로 올라왔다면 만덕산이 산 같아 보였을 것이다. 임도를 따라 간다. 마을이 가까운지 ‘컹컹’ 짖는 개소리가 시끄럽다.

축사를 지나 왼쪽 농로로 꺾어졌다. 거름 냄새가 심하고 군데군데 쌓아 논 거름더미에서는 기름진 물(?)이 흐른다. 그런데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기괴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지옥불에 시달리며 천당에 오르기만 기다리는 영혼의 소리 같아 듣는 이의 모골이 송연하다.

낮처럼 환하게 밝힌 계사(鷄舍)에서 나는 소리다. 닭들이 목이 쉰듯한 소리를 지른다. 계란 많이 낳으라고 밤낮으로 불을 밝혀 스트레스를 받은 닭들의 비명이다. 건강한 닭(육체/ 정신)이 건강한 알을 날 것 같다. 앞으로 계란을 먹을 때마다 저 비명이 들릴 것 같은데 제대로 계란을 먹을 수 있을라나?

바닥표시(좋은사람들-중요 분기점마다 선두가 깔아 놈)를 따라 좌측 숲으로 들어 갔다. 잘 나가던 길이 길게 늘어선 무덤(7~8기)에서 끊어졌다. 한참을 헤매다 반대 끝에서 길을 찾아냈다. 길이 너무 좋아 불안할 정도다. 여꾼들은 오늘 같은 산행이라면 10시간 이내엔 문제 없다며 한껏 기개를 높인다.

희미한 어둠 속에 대리석(납골당)이 번쩍인다. 흙 무덤은 밤길에 만나도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이 드는데 돌로 만든 납골당은 차고 섬뜩하다. 죽은 소나무가 길을 냈다. 이젠 풀벌레 소리 보다 높던 여꾼들 목소리도 잠잠하고 그 여운을 소쩍새 소리가 메운다. 고만고만한 낮은 봉우리 세 개를 넘어 잡목이 우거진 급 내리막을 만났다.  

모처럼 가파른 오르막이다. 새벽으로 랜턴 불빛이 많이 흐려졌다. 아직까지는 여유 있게 올라간 봉우리 정상에 후미가 휴식을 해 나도 물 한 모금 마시며 숨을 돌렸다. 날이 밝아 온다. 낮은 봉우리도 ‘산’자가 붙으면 뭐가 달라도 다른데 역시 긴 오르막에 처음으로 힘이 부친다. 물기 어린 쌩얼의 쑥부쟁이가 단조로운 오름 길에 힘을 보태 준다. 정상(관산)에 이르니 무덤이 있다.

관산(冠山)은 산의 모습이 멀리서 볼 때 신라시대에 벼슬을 하는 사람이 쓰는 관(冠)과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아마도 관(벼슬)을 쓴 후손을 기원하며 이 곳에 무덤을 쓴 것 같다. 후미가 긴 오르막에 힘들었는지 다시 휴식을 한다. 나도 만년 꼴찌지만 내쳐 걷기로 했다.

물안개가 넘나드는 능선을 따라 간다. 멀리서 고함(경고) 소리가 들려 무슨 일인가 했는데 깎아지른 급 경사다. 길이 젖어 아차 하면 그대로 굴러 떨어질 판이라 걸음걸음에 조심을 하지만 중심잡기가 사납다. 관목 줄기를 잡아 채고 기다시피 최대한 자세를 눕혀 조심스럽게 내려가다 중간 턱에서 숨을 골랐다.

내리막에 집중하느라 어느새 날이 훤하게 밝은 줄도 몰랐다. 이제는 필요 없는 랜턴을 갈무리하고 문득 앞산을 보니 짙푸른 초록바다다. 멀리서 보면 山色은 한여름이다. 그러나 산 속을 걸어보면 가을이 다가왔음을 알 수 있다. 풀벌레 소리가 그렇고 땅에 떨어진 도토리 열매가 그렇다. 아직 나무까지는 아니지만 확실히 풀빛은 완연한 가을이다.

다시 비탈에 집중했다. 계속 이어질 것 같던 비탈이 드디어 숨을 죽여 긴장의 끈을 풀었다. 곳곳에 벌목과 가지치기로 널브러진 소나무가 새벽의 숲길을 처참하게 만든다. 죽었어도 소나무가 무성했던 곳은 잡목이 없지만 참나무가 자라는 지역은 잡목투성이라 잡목이 무성한 곳을 올려다 보면 어김없이 참나무가 있다.

억새가 어느새 여물어 머지않아 터질 것 같다. 산비둘기는 구슬픈 듯 울고 향긋한 풀 향기가 아침바람에 실려오는 기분 좋은 길이다. 잘 생긴 소나무도 간혹 만나고 박새 울음 소리도 정겹다.

임도를 지났다. 뒷동네 오솔길 같은 길이다. 근처의 많은 무덤에 심은 향나무가 퍼졌는지 향나무를 심심찮게 만난다. 툭 터진 산허리에서 앞산(인내산?) 줄기를 조망한다. 푸른 용이 꿈틀대듯 산과 산줄기가 물결이 흘러가듯 끝없이 넘실댄다. 정상에 흰구름을 인 끝자락 산줄기는 그대로가 산수화다. 봉우리 공터에 중위 그룹이 대거 휴식을 하고 있어 나도 곁에 앉았다.

휴식을 한지 한참이 됐는지 일행 중 한두 분은 출발을 한다. 한껏 여유를 부리다 출발 하려는 김재환님의 배낭 틈새에서 간식거리가 쏟아졌다. ‘워매’ 하면서 잽싸게 집어 넣지만 다시 쏟아지고 넣으면 또 쏟아 지고를 되풀이해 보고 있던 대원들 사이에 웃음이 터졌다.    

나무를 감은 칡잎이 누렇다. 어쩔 수 없는 가을이다. 툭 터진 곳은 어디나 녹색으로 창창한 산줄기를 볼 수 있다. 갑자기 날이 컴컴할 정도로 어두워 심상치 않다. 바람이 시원하고 해도 없으니 비만 안 오면 등산하기 최상의 날인데 어디 세상일이 뜻대로 되던가?

내가 보기엔 평범한 버섯인데 앞 서 가는 분이 버섯만 보면 숨은 보물을 찾은 듯 근접 촬영을 한다. 습기가 많아 버섯 찾기 좋은 오늘 같은 날이 저 분에게는 안성맞춤일 것이다. 고도차가 없는 걷기 좋은 솔숲이 계속 된다. 이런 길도 그냥 길은 아니라는 듯 정맥을 알리는 리본이 걸음마다 펄럭인다.

농민전쟁 때 녹두장군 전봉준의 농민군이 관군과 결전을 위해 백산에 모였는데 ‘서면 백산(白山) 앉으면 죽산(竹山)’이라는 말이 생겼다. 죽창을 든 농민군이 일어서면 흰 농부복으로 가득하고, 앉으면 뾰족한 대창뿐이라서 생긴 말이라는데 지금은 산꾼이 하도 많아서 어느 산이나 앉으면 리본이요 서면 등산복이란 생각이 뜬금 없이 든다.

4단으로 이어진 무덤을 지나쳐 봉우리를 순식간에 올랐다. 꽃 모양이 햇살이 퍼져 나간 듯한 흰 참취꽃이 홀로 피어 주위를 압도 한다. 이 곳엔 도토리 사냥꾼(사람)이 없는지 도토리가 지천으로 깔렸다. 계속되는 행군에 나도 조금 지친다. 안개로 숲이 흐릿하고 물방울이 바람에 후두득 떨어진다. 길게 내민 꽃 끝을 살짝 말아 올려 수줍음을 삼킨 자주 빛 붉은 물봉선이 피었다.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351.4m)에 올랐다. 부부 산꾼이 다정하게 쉬고 있는 정상을 지나쳤다. 오늘 내리막은 다 급한데 지금도 그렇다. 다시 편한 능선이다. 앞이 터진 산허리에서 지나온 관산을 본다. 중절모 같이 생겼다. 똑 같은 그림을 본적 있다. 어린왕자의 첫 페이지에 나오는 삽화(코끼리를 삼킨 뱀)와 너무나 똑 같다.

잘 정돈된 길이 무덤으로 이어진다. 옹벽 시멘트계단을 밟아 1차선도로(한무당재)로 내려 갔다. 이곳은 옛날 무당 할미를 모신 서낭당이 있었다고 해서 한무당재 또는 할미당재로 불리고 혹은 근처 골짜기에 靑石이 많고 산적이 출몰했다 해서 청석골재라고 불려 지기도 하는 고개이다.

옹벽 시멘트계단을 이용하여 반대편 산기슭으로 올랐다. 무덤 진입을 경고하는 금줄을 지나 무덤 앞에서 좌측 숲으로 들어 갔다. 날이 점점 깜깜해지는 게 금방이라도 쏟아질 아슬아슬한 분위기다.

봉우리(267m)를 지나 조금 내려간 능선에서 앞서간 대원들 대부분이 식사를 한다. 대원들과 함께 식사를 할까 망설이다 310m봉에서 하기로 하고 내쳐 걸었다. 우측 멀리 계단 논이 보인다. 누런 빛이 살짝 벤 푸른 논이 산자락에 포근히 안긴듯한 풍경이 정겹게 다가 온다.

오르막 후 잠시 내려 갔던 길이 계속 올라 간다. 지도상으로 긴 거리가 아닌데 계속 이어지는 오르막에 아까 식사를 할걸 후회가 든다. 서너 번을 속고 서야 정상에 올랐지만 식사하기에는 좀 장소가 협소하다. 능선을 따라 가다 적당한 공터를 찾아내 자리를 잡자마자 빗줄기가 시작 됐다.  







⊙ 힘들다(어림산), 힘들어(382봉)

가늘던 비가 이내 폭우로 내린다. 얼른 비옷으로 갈아 입고 아내가 싸준 김밥을 꺼냈다. 빗속에서 먹기 좋은 식사가 김밥이라는 것을 오늘 알았다. 김밥 한 덩어리 입에 넣고 몸을 웅크려 빗물로부터 김밥을 보호하며 식사를 한다.

세찬 빗줄기에 쫓아 다니던 풀벌레 소리도 그치고 사방이 콩 볶는 빗소리다. 시야를 긋는 빗줄기에 모두(나/나무/산)가 빗속에 파 묻힌다. 빗줄기가 거세질수록 비옷을 때리고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에 심장 고동이 요동치지만, 빗줄기에 몸을 맡긴 세상만물은 오히려 차분하다. 청승 맞은 이 순간이 오늘 산행 중 하이라이트가 아닌지 모르겠다.



          •••
텅 빈 내 꿈의 뒤란에
시든 잡초 적시며 비는 내린다.
지금은 누구나
가진 것 하나하나 내놓아야 할 때
풍경은 정좌하고
산은 멀리 물러앉아 우는데
나를 에워싼 적막강산
그저 이렇게 빗속에 저문다.
살고 싶어라.
사람 그리운 정에 못 이겨
차라리 사람 없는 곳에 살아서
청명과 불안
기대와 허무
천지에 자욱한 가랑비 내리니
아 이 적막강산에 살고 싶어라.

『비』— 이형기




식사를 끝내고 나를 지나쳐간 대원들을 쫓아 갔다. 빗물이 길을 따라 작은 내가 되어 흐른다. 빗줄기가 약해지고 땀이나 우비(웃옷)를 벗고 방수 모자를 썼다. 앞이 환히 트이며 임도가 나왔다. 왼쪽에는 연습 골프장 크기의 잔디밭이 있다.

산 입구를 물봉선이 화단처럼 예쁘게 장식했다. 미끄러운 절개지를 지나 숲으로 들어 갔다. 요란한 빗소리가 힘든 오르막으로 거칠어진 내 숨소리를 지운다. 정상(남사봉 471m)은 여름산이 그렇듯 조망이 별로다.    

남사봉(南莎峰)은 남쪽 자락에 있는 경주시 현곡면 남사리(南莎里)마을에서 따온 이름이다. 마을이 남향으로 향하고 있다고 하여 남사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곳은 어림산(御臨山, 510m)과 인내산(534m) 등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어 아늑하고 산세가 수려하여 世居之地의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남사봉에서 방향을 왼쪽으로 틀어 내려 간다. 오늘 만나는 내리막은 무조건 급경사여야 하는지 이번에도 급하다. 임도를 따라 무리 지어 핀 구절초, 참취를 구경하고 빗물에 흩날리는 쑥 향기를 맡으며 걷는다.

우측 숲으로 들어 갔다. 작은 봉우리(390m)를 지나 가늘어진 비를 벗 삼아 내려가니 무덤이 나온다. 무덤에서 좌측으로 꺾어 도로(마치재)를 바라보며 간다. 두 대원이 도로변 풀밭에서 식사를 한다. 차양막을 치고 비와 상관 없이 여유 있게 식사하는 모습이 유원지에 놀러 나와 우중 소풍을 즐기는 영락없는 관광객이다.

마치재(馬齒)는 황수탕으로 유명한 덕정리 청석(靑石)마을과 경주시 현곡면의 남사리로 연결하는 고개로서 927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이다. 이곳의 지형이 말의 이빨과 비슷하다고 하여 마치, 말티재 또는 마현(馬峴)이라 부르기도 하는 곳이다.

도로 건너편 입구에 배롱나무에 붉은 꽃보다 많은 알록달록 리본이 달렸다. 숲에 들어서자마자 잡목을 헤쳐야 했다. 잡목 곳곳에 날카로운 가시로 몸을 훑어대는 청미래덩쿨도 숨어 있다. 계속 이어지는 가파른 오르막 때문에 대원들이 가끔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거나 웃옷을 벗는다.

나도 다리가 무겁지만 쉬지 않고 힘을 내 보기로 했다. 그사이 빗줄기는 부쩍 약해졌다. 한참을 가다 위를 보니 아직도 제자리인양 그대로인 것 같다. 미친 듯이 속도를 올리고 최면을 걸었다. ‘정상에서 얼려온 물을 마시자. 조금만 힘을 내면 얼음물이 기다린다.’ 입에서 단내가 나고 쏟아지는 땀이 빗물처럼 흘러 손으로 훑어 허공에다 뿌린다. 인내의 한계점을 보고서야 정상(1봉)을 밟았다.

얼른 의자를 펴고 얼음물을 맘껏 들이켰다. ‘꿀덕~ 꿀덕’ 찬 물이 목구멍을 넘는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짧은 너덜을 지나 만난 2봉을 쉽게 정복한 다음 점점 더 쉬워지는 3봉과 거창한 무덤이 있는 4봉을 거침 없이 주파하여 어림산(510.4m)에 올랐다. 어림산은 신라시대에 임금님이 둘러보았다 해서 어림산(御臨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어림산 정상은 그저 그런 봉우리라 그냥 자리를 떴다. 어림산 오르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평탄한 녹색길이다. 습기에 눅눅해진 진득한 풀냄새가 코 끝에 걸린다. 그 동안 비가 그치고 산매미 소리가 허공에 짱짱하다.

칡으로 포위된 철탑을 지났다. 솔숲이라 잡목이 없다. 돌배가 도토리처럼 무수히 떨어졌다. 대원 한 명이 버섯 두어 송이를 손에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한눈에 영지일 것 같아 확인 차 물어 보니 영지가 맞다고 한다.

봉우리를 하나 넘었다. 까치 우는 소리보다도 더 시끄러운 산까치(어치)가 운다. 산까치 소리를 들을 때면 저 시끄러운 새가 울면 우리님이 오신다고 노래 했는지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최안순(산까치야)/산 까치야 산 까치야 어디로 날아가니 네가 울면 우리님이 오신다는 데…/

오늘 만난 대부분의 봉우리가 그렇지만 이번 봉우리(308m)도 특징이 없다. 다시 어두워지며 안개가 밀려 온다. 바람에 흔들린 나무가 빗방울을 떨궈 낸다. 비에 씻겨 이제 방금 돋은 새싹처럼 초록의 잎새들이 바람에 몸을 까불린다. 묘가 있는 봉우리를 직진으로 지나쳤다.

언제 그랬냐는 듯 날이 밝아 온다. 물안개를 밀치고 햇살이 나뭇잎에 내려 앉는다. 해를 받은 숲이 자연의 색 그대로의 빛으로 눈을 찌른다. 안부를 지나 봉우리에 대원들이 쉬고 있어 나도 배낭을 벗었다. 지도를 보니 이제 호국봉만 넘으면 끝인 것 같아 봄날 고양이처럼 게으름을 피워 본다. 어느새 일행이 다 떠나고 혼자다. 땀이 식어 추위에 쫓겨 할 수 없이 배낭을 맸다.

점점 잡목이 많아진다. 떡갈나무도 대부분 키가 작아 관목에 끼여 길을 방해 한다. 해가 뜨고 풀이 무성해지자 다시 풀벌레가 연주를 시작 했다. ‘풀벌레 소리와 함께 산행을’이란 제목을 이번 산행에 붙여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철조망(좌측)을 따라 난 길을 오른다. 잡목이 더 심해졌다. 찌르고 잡아 끌고 발을 거는 잡목 때문에 여기저기 몸에 상처가 났다. 청미래넝쿨 열매가 빨갛게 익어 간다. 안부를 지나 다시 오르막이다.

날이 확실히 개어 이젠 더위와의 전쟁이다. 잠깐의 오르막에도 땀이 줄줄 흐른다. 자동차 소리가 들리고 희미하게 차도(좌측)가 보인다. 앞에 우뚝 선 봉우리가 오늘 마지막 난관인 것 같은데 만만찮을 것 같다.

역시나 힘들다. 중간에서 쉬고 있는 대원들을 지나쳐 내쳐 걸었다. 멀리 우측으로 네모로 보이는 저수지(하곡지)가 있다. 푸른 산줄기 사이로 널찍하게 차지한 저수지가 한 폭의 그림 같다. 눈은 그림 감상에 즐거운데 몸은 지칠대로 지쳐 죽을 지경이다. 조금만 더, 한번만 더로 몸을 달래가며 기어이 돌탑으로 삼각점을 에워싼 정상(382.9m)에 섰다.

돌탑에 주저 앉아 물 한병을 단숨에 마셨다. 중간에 쉬던 대원들이 그새 나를 지나친다. 나도 길을 이었다. 이끼가 낀 나무가 곳곳에 보인다. 흰 표지(호국봉)말뚝이 있는 봉우리에 도착 했다.

호국봉은 국립영천호국원 뒷산 봉우리로 국립영천호국원에는 영천에서 북한군 제15사단을 섬멸하여 낙동강 방어선의 최후의 교두보였던 영천을 탈환, 북진의 계기를 마련한 전투에서 순국한 넋들을 모신 곳이다.

차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종착역을 목전에 둔 걸음이 가뿐하다. 다시 빗방울이 떨어지지만 날이 훤해 쏟아질 것 같지는 않다. 거대한 송신탑(한국통신 프리텔 송신탑)을 만났다. 시끄러운 송신탑을 가로 질러 밑으로 내려 갔다.

‘그러나 언제나 너는 내 남자~’ 마이크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가 들린다. 바로 코 앞이 시티재인게 확실해 발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묘지에서 우측으로 꺾어 마이크 소리 나는 곳으로 틀었다. 키를 넘는 억새를 밟은 선두의 흔적을 쫓아 수로를 거쳐 드디어 도로(시티재)로 내려 갔다.

국토지리정보원의 지형지명서비스에 의하면 시티재는 해발 300m의 안강읍 강교에서 영천군 고경으로 넘어가는 험준한 고개로서 식량과 상품을 운반하는 마소의 등에 실린 시티다발(?)의 이름을 따서 시티재라 한다.  






⊙ 목욕탕이 따로 있네

산업도로(28번 국도)를 건너 안강휴게소로 갔다. 먼저 온 일행에게 물으니 왼쪽으로 가면 목욕탕이 나온다고 한다. 목욕탕? 반신반의하며 가 본 곳에는 샤워꼭지도 여러 개가 있는 널찍한 목욕탕이 있다. 산업도로의 특성상 기사님들의 편의를 위해 마련한 것 같은데 아쉬운 점은 물이 너무 찔끔거린다는 것이다. 돈을 받더라도 시원하게 물이 나왔으면 좋았을 것을.

욕탕은 만원이고 허기가 져 식사부터 하기로 하고 휴게소로 들어가 육개장으로 허기를 메웠다. 시장이 반찬인지 휴게소 음식치곤 먹을만하다. 옷 보따리만 들고 다시 욕탕으로 갔더니 부부팀의 남꾼이 아내가 기다린다며 선처를 호소 한다. 산행 내내 다정하게 동행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는데 끝까지 아내를 배려하는 남꾼이 여전히 보기 좋다.

최대한 빨리 땀을 씻고(졸졸거리는 물이 아쉽다) 등산화와 바지의 흙을 대충 씻어낸 뒤 개운하게 새 옷으로 갈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어쨌거나 대간이나 정맥 중 샤워 시설이 있는 휴게소를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라 로또 복권을 만난 기분이다.

시원한 자리마다 동그랗게 둘러 앉은 대원들이 소주와 맥주로 산행 뒤풀이를 한다. 산줄기에 따라 산악회를 달리하여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이 익숙하지만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리기에는 내 주변머리가 부족하다.

맥주 한 캔을 사 들고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휴게소 뒤편으로 다음 구간의 들머리가 보인다. 들머리를 지키던 들고양이가 내 인기척에 놀라 산으로 내 빼는데 그 날램이 산짐승 같다.

후미가 속속 도착 한다. 시원한 그늘에 앉았더니 나도 모르게 졸음이 밀려 온다. 꾸벅꾸벅 졸다가 출발한다는 대장님의 안내에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출발 한다(14:59). 눈을 감자마자 깊은 잠 속에 빠졌다. 여산휴게소(17:15~17:36)를 거쳐 사당에 도착(19:36) 하는 것으로 오늘 산행도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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