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배령 오르는 길. 머리가 어지럽다.
언덕바지라 힘이 드는데 절로 눈이 감기며 사정없이 졸립다.
생각해보니 버스 안에서 잠을 제대로 자질 못했다.
걸음도 무거운데 자꾸만 눈꺼풀이 내려앉아 졸면서 걷는다.
(백두산도 아닌데 고산병도 아닐꺼고...하기는 백두산에서도 촌스럽게 고산병을 앓는 건 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신배령에서는 내려갈 수 있을거야........
드디어 신배령.
기다리고 계시던 대장님. 같이 탈출해야 할 두사람이 이곳을 그냥 지나친 것 같으니 더 가서 탈출하자 하신다. 이미 지쳤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야속한 한마디를 던진 대장님은 다시 금새 시야에서 사라지고, 수풀은 지금까지보다 더 우거진 것 같다. 뱀도 많은 산이랬는데...겁이 나서 스틱을 의식적으로 두드리며 간다.
한참을 가다가 겁이 나서 '대장님 대장님" 하고 소리쳤더니 갑자기 우두두둑 꽝 하는 소리에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다. 아니라도 내내 파헤쳐진 흙을 보며 이 산에 멧돼지가 엄청 많구나 했는데 아마도 근처에 있던 돼지들이 내 소리에 놀라 달아난 모양이었다.
탈출점 하나를 놓치고 나서의 길은 영 멀고 힘들다. 마치 때를 놓친 핑계로 완주라도 시키려는 듯 대장님의 뒤꼭지는 도무지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도대체 얼만큼 더 가야 이 숲을 탈출할 수 있을까 머릿 속엔 온통 그 생각뿐이다.
백두대간. 우리나라의 등줄기를 걸어본다는 데에 무슨 이견이 있을까마는 어둠 속에, 아니 훤한 낮이라도 수풀만 헤치며 나아가는 이 일이 아직도 내게는 무의미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이 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밟아본 후에도 그리 말하진 못하리라. 의미는 찾는 것이 아니라 부여하는 것이기에.
숲속에 버려져 혼자 걷는 길엔 이런 저런 단상이 끝도 없이 떠오른다.
만월봉을 어떻게 지났는지 기억에 없다.
숲속에서 온전히 혼자가 되었다가 다시 사람을 만난 것에 그저 반가울 뿐.
양대장님 따라 두 명은 이미 명개리로 빠졌고, 그도 지나친 앞사람 한 명 잡아두고 대장님은 되돌아 여기까지 오셨단다. 혹시나 다른 길로 빠질까봐.
오늘 하루 나는, 책임감을 지키려는 대장님을 얼마나 더 힘들게 한 것일까.
응복산.
290m 더 지난 지점. 표지판이 서있다.
어쨌거나 진고개에서 15.58km를 걸어왔단 말이지.
구룡령까지는 아직도 6.4km 가 남아있는 지점. 명개리 1.3km라는 표지판을 보고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하산길로 접어든 대장님은 혼자 앞서보낸 사람을 따라잡으려고 마치 산악마라톤하듯 길을 내달린다. 처음에 열심히 뒤를 쫒던 나는 이내 지쳐버린다.
물소리가 들려 곧 계곡을 만나려니 했는데 한참토록 계곡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윽고 계곡 건너 나타난 큰 길.
보아하니 이곳에서도 한참을 걸어야 할 듯 싶다.
실망과 지루함이 겹쳐 타박타박 걷는 길. 드디어 대장님이 손짓하신다.
길가 동네사람 집에서 석쇠에 굽는 고기를 맛보고 계시는 대장님의 여유.
알고보니 이집 주인 벌써 앞서간 양대장님 일행을 구룡령까지 한탕 날라주고 와서 마악 식사를 하려던 참. 그러니 차마 얼른 가자 하지 못하고 소주 한 잔, 고기 한 점에 붙들려있었던 것. 게다가 한 분은 걸어서 내려가셨다 하니 얼른 픽업해야 할텐데...
마음이 급해서 빨리 일어서자 했지만 사실 그 고기 너무 맛있었다. 한 점 더 먹고 올 걸...ㅎㅎ
차로 빠져나오는 홍천군의 비포장도로 계곡길은 꽤나 길다.
지친 발을 탁족하고 계신 앞의분을 태우고도 한참을 나와 다시 산길굽은 도로로 올라서도 한참을 가서야 드디어 '구룡령'
(운무에 둘려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곳이 내 발로 닿지 못한 구룡령이란 거지)
사람들 기다리게 할까봐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도 꼬래비로 하산하여 씻으러 간 이들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늦은 출발이지만 그래도 귀경길에 회 한접시 먹어야지 하며 주문진항에 들러, 지난번에 이어 두번 째 찾은 철이네 횟집.
빗길산행에 황토바지가 된 바짓단을 둘둘 말고 앉아먹는 그 맛이란...
탈출을 고대하며 힘들었던 그 순간은 벌써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다음에도 또 대간길에 나설 수 있을까.
힘들다고, 대원들에게 민폐끼친다고 안 갈거야 하면서,
'이 구간 탈출로는 어디야'하면서 눈치없이 또 따라나서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바로 그 망각의 힘 때문에...
^_^;;